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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의 말 (Turin Horse) 감상문

by info8693 2025.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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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 타르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토리노의 말'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철학자 니체가 토리노에서 말을 때리는 마부를 보고 말을 안고 울었다는 일화에서 시작하여, 그 말과 마부의 삶을 6일간 따라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침묵 속에 담긴 삶의 무게

'토리노의 말'의 가장 인상적인 점은 대사의 희소성이다. 영화는 대부분 침묵 속에서 진행되며, 인물들의 일상적인 행동을 길고 정적인 쇼트로 담아낸다. 마부와 그의 딸이 감자를 먹는 장면, 옷을 입고 벗는 장면, 물을 긷는 장면 등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 영화의 주를 이룬다. 이 단조로운 반복은 처음에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안에서 삶의 본질적인 리듬과 무게를 발견하게 된다.

특히 영화의 초반부, 말이 마차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은 거의 10분에 걸친 롱테이크로 촬영되었는데, 이 장면은 말의 고통스러운 걸음걸이와 바람에 시달리는 풍경을 통해 앞으로 펼쳐질 삶의 무거움을 예고한다. 바람은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라, 인물들의 삶을 압박하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한다.

종말에 대한 명상

영화는 6일이라는 시간 속에서 점점 더 암울해지는 세계를 보여준다. 처음에는 우물에서 물이 나오다가 이내 말라버리고, 불이 꺼지며, 바깥 세계는 점점 더 어두워진다. 이는 마치 세계의 종말, 혹은 삶의 의미가 소진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이 영화가 '행동'이 아닌 '상태'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인물들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거나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존재할 뿐이며, 그 존재 자체가 영화의 중심이 된다. 이것은 현대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사 중심'의 접근과는 완전히 다른, 벨라 타르만의 독특한 영화 언어이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기록

'토리노의 말'은 현대 사회에서 점점 잊혀져 가는 것들, 즉 손으로 하는 노동, 자연과의 직접적인 대면, 기술 이전의 삶의 방식을 기록하는 듯하다. 마부와 그의 딸이 손으로 옷을 입고, 불을 피우고, 물을 긷는 모습은 우리가 현대적 편의 속에서 잊고 있는 삶의 기본적인 행위들을 상기시킨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 삶은 선택이나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견뎌내야 할 것이다. 이는 현대인의 '자아실현'이나 '행복 추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들에게 삶은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 음식을 먹고,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는 순환 속에 있다.

철학적 깊이

'토리노의 말'은 니체의 철학적 개념, 특히 '영원회귀'와 '신의 죽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의 반복되는 일상은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 즉 모든 것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개념을 연상시킨다. 또한 점점 어두워지는 세계는 '신의 죽음' 이후 의미를 상실한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영화 중간에 등장하는 집시들과 이웃의 방문 장면은 이러한 철학적 주제를 더욱 강화한다. 특히 이웃이 들려주는 독백은 세계의 타락과 종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으로,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더욱 심화시킨다.

시각적 미학

흑백 영상으로 촬영된 '토리노의 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각적 명상이다. 프레드 켈레멘의 촬영은 황량한 풍경,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 주름진 노인의 얼굴을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담아낸다. 특히 롱테이크와 정교한 카메라 무브먼트는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질감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카메라는 마치 관찰자처럼 인물들의 일상을 담아내지만, 때로는 그들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기도 한다. 이러한 카메라 워크는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속 세계에 깊이 몰입하게 만들며, 인물들의 고립된 삶을 직접 경험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삶의 존엄성

'토리노의 말'은 겉보기에는 비관적인 영화지만, 그 안에는 인간 존재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존중이 담겨 있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일상을 유지하려는 인물들의 모습은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그들은 말하지 않지만, 그들의 침묵과 행동은 삶에 대한 무언의 저항이자 긍정으로 읽힌다.

특히 마부의 딸이 매일 아침 아버지를 돕고, 그를 돌보는 모습은 극한 상황에서도 유지되는 인간의 도덕적 의무와 애정을 보여준다. 이는 벨라 타르가 비관적 세계관 속에서도 놓치지 않는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드러낸다.

결론: 침묵 속의 시

'토리노의 말'은 영화라기보다는 하나의 시적 명상에 가깝다. 그것은 이야기를 전달하기보다는 존재의 상태, 삶의 질감,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게 한다. 영화가 끝날 때, 우리는 하나의 이야기를 본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경험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벨라 타르는 이 작품을 통해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며, 동시에 자신의 영화 세계를 완성한다. '토리노의 말'은 단순한 오락이나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추구하는 영화가 아니라, 삶과 존재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는 철학적 작품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천천히 보고, 깊이 생각하며, 존재의 본질을 묻게 한다.

이 영화는 현대 영화계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종류의 영화, 즉 상업적 성공보다는 예술적 진실을 추구하는 순수 영화예술의 위대한 사례로 남을 것이다. 벨라 타르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토리노의 말'은 한 위대한 영화작가의 마지막 시적 선언이자, 영화 예술의 본질적 가능성에 대한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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