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소리를 따라 흘러간 삶의 강 – 영화 「서편제」 감상문

by info8693 2025. 4. 23.
반응형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영화 「서편제」는 이 단순하면서도 깊은 메시지를 우리 가슴속에 조용히 심는다. 인간의 아픔, 집착, 그리고 예술의 본질을 고요하게, 그러나 강렬하게 노래하는 이 작품은, 소리라는 매개를 통해 삶과 예술, 그리고 관계의 의미를 되짚게 한다.

임권택 감독의 1993년작 「서편제」는 한국 전통 판소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히 소리를 배우는 여정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슬픔의 뿌리에서 피어난 예술이자, 분리와 고통으로 짜인 인간의 운명을 관조하는 깊은 철학이다.

 

잃음으로 완성된 예술

서편제의 중심에는 송화라는 인물이 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 유봉에 의해 시력을 잃는다. 그것은 명백한 폭력이었지만, 유봉은 그것이 소리를 완성하는 길이라 믿는다. 그는 그녀의 눈을 앗아가고, 대신 귀와 마음으로 소리를 듣게 한다. 우리는 여기에 예술가의 ‘고통의 운명’을 본다. 진짜 예술은 고통의 심연을 지나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유봉은 자신이 믿는 예술을 위해 가족이라는 울타리조차 희생시킨다. 그의 선택은 잔인했지만, 그것은 예술가의 광기 어린 집착이 아니라, 예술이란 무엇인지를 끝없이 묻는 한 인간의 절규였다. 결국 그의 인생은 완성되지 못한 소리처럼, 어딘가 끊긴 음계 위에 머무른다.

떠남과 기다림의 서사

송화와 동생 동호는 유봉의 교육 아래 함께 자라지만, 곧 갈라진다. 동호는 아버지의 방식에 반발하며 떠나고, 송화는 끝내 남아 소리를 택한다. 이 둘의 재회는 영화의 후반부, 아득한 세월을 지나 조우하며 이루어진다. 이 장면은 그 자체로 한 편의 판소리다. 오랜 기다림과 그리움, 그리고 풀지 못한 감정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동호가 송화를 찾아와 소리를 청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시간의 흐름조차 잊고 숨을 죽이게 된다. 송화가 부르는 <춘향가>의 한 대목, 그 한 소절에 그녀의 인생 전체가 실려 있는 듯한 울림이 있다.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그녀가 소리로 세상을 보는 방식은, 우리에게 ‘보는 것’의 진짜 의미를 되묻게 한다.

전통이라는 이름의 고독

「서편제」는 한국 전통예술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방식은 찬란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전통은 외롭고, 고요하며, 때로는 고통스럽다. 영화는 소리꾼들이 떠도는 길 위에서 겪는 설움과 가난, 그리고 묵묵한 수련의 세월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전통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그것을 가르쳐준다.

카메라는 넓은 산천을 배경으로 인물들을 조용히 따라간다. 말보다 눈빛, 대사보다 침묵이 많다. 그 침묵 속에서 울려 퍼지는 북소리와 고음, 잔잔한 소리는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깊은 정서를 남긴다. 이 영화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이유는, 바로 이 조용한 절제에서 나오는 힘이다.

소리를 넘어선 이야기

결국 이 영화는 예술에 대한 이야기이자,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며, 시대의 이야기이다. 유봉은 자신의 예술적 신념 때문에 가족을 파괴했고, 송화는 그 예술 속에서 자신을 잃은 채 남아 있다. 동호는 떠났지만 끝내 그 소리로 돌아온다. 이 세 사람의 인생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흘렀지만, 결국 같은 강줄기를 따라 흘러갔음을 느끼게 한다.

“소리를 들려달라”는 동호의 말은 단지 판소리를 듣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송화의 삶, 그 고통의 흔적, 그리고 자신이 떠났던 과거와의 화해를 청하는 절박한 외침이다. 그리고 송화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녀의 소리는 이제 더 이상 훈련된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눈이 멀고, 삶이 부서져도 꺾이지 않은 영혼의 목소리다.

맺으며

「서편제」는 한국 영화사에 있어 하나의 ‘소리’이다. 그것은 우리 문화의 깊이를 세계에 알렸고, 동시에 인간의 고통과 아름다움을 가장 한국적인 방식으로 드러냈다. 이 영화는 격렬하지 않다. 대신, 아주 조용히, 천천히, 그러나 깊이 스며든다.

삶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이며, 사랑과 가족이란 무엇인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해 「서편제」는 확답을 내리기보다는, 하나의 소리를 건넨다. 그 소리는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닿아,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