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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어던(Leviathan): 현대 러시아의 암울한 초상

by info8693 202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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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즈비야긴체프의 걸작 '리바이어던'은 제목처럼 거대하고 압도적인 영화다. 성경과 토마스 홉스의 저서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현대 러시아 사회의 부패, 권력,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을 혹독하게 그려낸다.

 

 

압도적인 풍경, 압도적인 이야기

영화는 러시아 북부 바렌츠해 연안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첫 장면부터 펼쳐지는 황량하고 거친 해안가의 풍경은 이야기의 깊이와 무게감을 더해준다. 차가운 바다, 회색빛 하늘, 그리고 해변에 버려진 고래 뼈대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적 이미지로 작용한다. 이 모든 풍경은 주인공 니콜라이의 삶만큼이나 거칠고 냉혹하다.

니콜라이는 자신의 땅과 집을 지키기 위해 부패한 시장과 맞서 싸우는 평범한 자동차 정비공이다. 그의 단순한 저항은 곧 거대한 국가 기계와의 싸움이 되고, 그 과정에서 그의 삶은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주변 인물들 - 아내 릴랴, 친구이자 변호사인 드미트리, 그리고 사춘기 아들 로마 - 모두가 이 거대한 힘 앞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고통받는다.

 

권력의 본질과 부패

즈비야긴체프 감독은 '리바이어던'을 통해 현대 러시아의 권력 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영화에서 시장은 국가, 교회, 법원을 모두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개인을 압박한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니콜라이의 집이 강제 철거되는 과정이다. 중장비들이 그의 집을 파괴하는 모습은 개인의 존엄성과 권리가 얼마나 쉽게 짓밟힐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또한 영화는 러시아 정교회가 정치 권력과 결탁하는 모습도 꼬집는다. 니콜라이가 신부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는 장면에서, 신부는 그에게 "욥기"를 언급하며 고통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이는 종교조차도 권력의 도구가 되어 버린 현실을 보여준다.

 

인간의 나약함과 운명

'리바이어던'은 단순한 사회 비판 영화를 넘어, 인간의 나약함과 운명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니콜라이는 처음에는 정의를 위해 싸우는 강한 인물로 그려지지만, 점차 알코올에 의존하고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의 아내 릴랴도 현실의 무게 앞에서 결국 파국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니콜라이가 겪는 종교적 회의와 절망이다. 그는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라고 외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느끼는 영적 공허함과 버려진 듯한 감정을 반영한다.

 

영화적 기법의 탁월함

즈비야긴체프 감독의 영화적 기법은 이야기의 깊이를 더한다. 길고 느린 쇼트, 자연 풍경의 압도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미하일 크리친이 작곡한 필립 글래스 스타일의 미니멀한 음악은 관객에게 깊은 사색의 시간을 제공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카메라 워크다. 카메라는 때로는 멀리서 인물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처한 환경의 거대함과 개인의 작음을 대비시키고, 때로는 가까이에서 인물들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포착한다. 이러한 시각적 언어는 영화의 주제를 더욱 강화한다.

 

결론: 현대 러시아를 넘어선 보편적 메시지

'리바이어던'은 표면적으로는 현대 러시아 사회의 문제를 다루지만, 그 메시지는 보편적이다. 권력의 남용, 부패, 개인의 존엄성 상실 등의 문제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해 왔다. 즈비야긴체프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이러한 불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니콜라이처럼 맞서 싸워야 하는가, 아니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새로운 정교회 건물이 니콜라이의 땅 위에 세워지고, 권력자들이 그곳에서 미사를 드리는 모습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슬프다. 그것은 정의가 패배하고 권력이 승리한 현실, 그리고 그 승리를 종교로 정당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바이어던'은 절망적인 영화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현실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작은 저항의 가치를 일깨운다. 니콜라이의 패배는 슬프지만, 그의 저항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리바이어던'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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